생텍쥐페리의 소설에서는 비행하는 장면이 정말 많이 나온다.
<어린왕자>가 연애소설이라면 <야간 비행>, <인간의 대지>는 인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각 소설은 모두 비행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비행 과정을 묘사하는 구절은 특히나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여 함께 비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비행의 두려움과 절경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고 보는 것 같다.
비행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야산에는 황금빛 저녁노을이 짙은 그림자를 뱃길처럼 그려놓고 있었다.
들판에 깔린 환한 빛의 노을은 쉽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이 지방에는 늦은 겨울에도 눈이 남아서 황금빛 저녁노을이 늦도록 들판을 물들인다.
이따금 바다보다도 인적이 드문 초원을 몇 백 킬로미터씩 비행하다 보면
외딴 농가를 만나기도 하는데 농가는 마치 출렁이는
초원의 물결 위로 인간의 삶을 싣고 조금씩 떠밀려가는 배처럼 보였다.
그럴 때면 그는 비행기 날개를 움직여 인사했다.
무선 기사는 저 하늘 어딘가에 과일 속의 벌레처럼 뇌우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의 도착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새장을 여는 그런 승리가 결코 아니다.
🌾 인간의 대지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명확히 말하자면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세계의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동료들이 이룬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자신의 돌을 하나 놓음으로써 세계를 건축하는 데 공헌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럼 사람들을 투우사나 노름꾼과 혼동한다.
죽음을 가소롭게 여기는 그들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죽음에 대한 경멸이 가소롭다.
그 죽음의 뿌리가 납득할만한 책임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면 그것은 빈곤한 영혼 혹은 무모한 젊음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자살을 시도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다.
어떤 사랑의 슬픔이 제 심장에 은밀하게 총알을 박도록 부추기는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그가 어떤 문학적 충동에 이끌려 결투용 흰 장갑을 손에 낀 것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슬픈 퍼레이드를 마주하고서 고귀함이 아니라 비참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 뒤, 두개골 아래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바보 같은 어린 소녀의 이미지 말고는.
🛩️ 야간 비행
그는 조종석에 머리를 파묻었다. 계기판 바늘에 형광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조종사는 숫자들을 차례차례 점검하며 자신이 창공에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웠다. 그는 강철 버팀대를 손가락으로 만지며 그 금속 덩어리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금속은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이다. 500마력의 엔진이 이 물체 속에 아주 부드러운 전류를 흐르게 하고,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금속을 벨벳처럼 부드러운 살로 변화시킨다. 다시 한 번 조종사는 비행하는 동안 현기증이나 도취가 아닌, 살아 있는 육체의 신비로운 활동을 체험했다.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한 그는 편하게 자리 잡기 위해 팔꿈치를 움직여 보았다. 그는 배전판을 두드려 보고, 스위치를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그리고 몸을 조금 움직여 등을 편안히 기대어 움직이는 밤이 엄호해 주고 있는 이 5톤짜리 금속 물체의 흔들림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자세를 찾았다.
🗺️ 인간의 대지 - (1)
자네가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해서 각박한 기술자가 되는 건 아니네.
우리의 급속한 기술적 진보에 겁을 먹은 이들을 기술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것처럼 보여.
물질적 부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
그러나 기계는 목적이 될 수 없다네.
비행기는 목적이 아니야. 그것은 도구야. 쟁기와 같은 하나의 도구.
기계가 인간을 파멸시킨다고 믿는다면, 그건 우리가 잠시 물러나 지금껏 겪은 급속한 변화의 결과를 평가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아서야.
인간의 역사가 20만 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100년 남짓인 기계의 역사가 뭐가 중요하겠어?
탄광과 전력발전소의 풍경에 이제 간신히 정착했는데 말이지.
아직 건축이 끝나지도 않은 새 집에 이제 살기 시작한 거야.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너무 급속도로 변했네.
인간관계, 근로 조건, 관습.
우리의 정신 자체도 가장 밑바닥부터 무너졌지.
분리, 결핍, 거리, 회귀의 개념은 동일한 언어로 불릴지라도 같은 현실을 내포하지 않아.
오늘날의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의 세계를 위해 정립된 언어를 사용하는 중인 셈이지.
과거의 삶이 우리 본성에 더욱 잘 부합하는 듯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언어가 우리 언어에 더 잘 맞다는 것 때문이야.
진보는 언제나 우리가 겨우 획득한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쫓아냈어.
우리는 나라를 아직 세우지 못한, 그야말로 이민자들인 거지.
🏔️ 인간의 대지 - (2)
“생텍쥐페리 씨, 귀하에 대해 파리 본사에 징계 처분을 요청했습니다. 카사블랑카를 출발할 때 격납고에 너무 급접하여 경로를 틀었습니다.”
내가 격납고에 바짝 붙어서 경로를 튼 것은 사실이었다.
이 남자가 화를 내면서 자기 일을 처리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 공항 사무실에 있었다면 겸손하게 그 비난을 감수했으리라.
하지만 그 비난은 전혀 뜻밖의 곳에서 우리에게 도달했다.
그걸은 이 듬성듬성한 별들과 두꺼운 안개층, 바다의 위협하는 듯한 기세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우편물의 운명, 우리 비행기의 운명을 제대로 장악하여 살아남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사소한 앙심을 우리에게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네리와 나는 느닷없이 엄청난 쾌감을 느꼈다.
…
이 남자가 즉각 이행했어야 할 유일한 의무는 우리가 별들 사이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수치는 틀렸다. 그 밖의 것에 관해서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네리가 쪽지를 내밀었다.
“그들은 바보 같은 짓을 그만두고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가려고 노력해야 맞지 않나…”
네리가 말한 ‘그들’이란 세상 모든 사람, 국회의원들, 해군과 육군, 황제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우리와 한판 붙겠다는 이 몰상식한 사람의 메시지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수성 쪽으로 경로를 틀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음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 무의미의 축제
물론 획일성은 어디에나 퍼져있지만, 그래도 이 공원에서는 획일성이 좀 다양하게 있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개별성의 환상을 지킬 수 있는거지.
우스운 것에 대한 성찰에서 헤겔은 진정한 유머란 무한히 좋은 기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 잘 들어, 그가 한 말 그래도 하는 거야.
‘무한히 좋은 기분’ 말이지. 조롱, 풍자, 빈정거림이 아니야.
오로지 무한히 좋은 기분이라는 저 높은 곳에서만 너는 사람들의 영원한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 있는 거라고.
…
“그런데 그걸 어떻게 찾지, 좋은 기분을?”
🥚 데미안
데미안은 사실 책보다 유튜브의 '너진똑'이라는 채널에서 분석 및 해석해준 내용이 더 재밌다.
꿈보다 해몽인 것 같기도 하지만 책만 읽었을 때는 그리 감흥은 없었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가지 뿐이다.
…
그의 가장 본질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데 있으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미상 속에 숨으려는 행위인 동시에 순응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
나는 자연의 실험체이다. 미지의 것, 어떤 새로운 것, 아마도 허무로부터 도전일 것이었고, 이 도박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송두리 때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사명인 것이다.
“사랑은 구걸해서는 안되는 거에요. 또 요구해서도 안되지요. 사랑은 자신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겁니다. 그러면 사랑은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
이렇게 해서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그의 마음 속에 지니게 되었다.
…
그는 사랑을 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